작가 스테이트먼트
내 작업은 돌봄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장애가 있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돌봄은 책임과 의무였고, 때로는 부담스럽거나 고통스럽기도 했다. 천을 묶어 염색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일상 속 돌봄의 굴레에 갇힌 나 자신을 꽁꽁 묶인 천의 모습에 투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아름답게 물든 천을 펼쳤을 때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화학염색에 사용하던 발염제(拔染劑)의 유독성을 알게 된 후, 천연 염료를 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원료부터 직접 재배할 수 있는 한국의 토종 쪽(indigo)를 기르고 그것을 염료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쪽으로 만든 염료인 ‘니람(泥藍 )’은 반드시 발효 과정을 거치며, 발효 중인 상태일 때만 염색이 가능하기에 매일 들여다보고 저어 주며 돌봐야 한다. 작업의 과정에서도 필연적으로 돌봄 행위가 이어진 것이다. 씨앗부터 싹을 틔워 쪽을 길러내는 지난한 시간, 니람의 발효 상태를 매일 확인하는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돌봄이란 결코 혼자서 일방적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텃밭에서 식물을 기르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흙과 물, 공기, 곤충과 새, 바람과 계절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텃밭에 가 있는 동안 나를 배려해 준 가족과 쪽 농사와 염색을 가르쳐 준 선생님, 그리고 텃밭을 함께 돌봐 준 이웃들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많은 동반자들을 얻었다. 돌봄의 과정은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향하는 관계, 서로를 위하는 마음, 서로를 변화시키는 작용이었다.
돌봄은 상호적이다. 돌봄은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돌봄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이런 동반자적 관계를 작업 안에서도 이어가고자 한다. 니람으로 염색한 천은 텃밭의 자연과 염료를 발효시켜 준 미생물이 나와 협업한 결과다. 쪽의 모습을 담은 평면 작품들은 함께 쪽을 돌봐 준 모든 이웃과 잘 자라 준 쪽에 대한 감사의 편지와도 같다. 텃밭에서의 시간을 담은 영상과 자연의 소리를 담은 사운드, 관람자의 체험을 유도하는 설치 작업들은 또 다른 만남이 시작되는 장소가 된다. 나는 삶에서 작품으로, 전시장으로 돌봄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계속해서 동반자를 만난다. 작품은 나에게 동반자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 씨앗이다. 그 씨앗이 각자의 삶에서 다시 자라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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